원래는 어제 일 마치고 바로 올 생각이었다.
다음날 일찌감치 투표하고,  돌아가서 학교에서든 방에서든 슬슬(몸 회복을 감안해서) 공부할 작정을 했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진 않는 법이다.

정신 못 차릴 만큼 아팠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생업을 내쪽에서 못하겠다 하기는 눈치보였고, 나서서 보니 신분증과 전화기가 수중에 없더라- 날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지금의 나와 동일인임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사진 하나 박힌 주민등록증이라는 데 괜스레 화가 났다. 내가 고거 하나 소지하지 않았다고 상대적으로 훨씬 가까운 주민등록상 소재지를 두고 거소로 돌아가야 한다니, 다음날 다시 투표하러 가야 한다니!

(아이 표정은 한참이나 샐쭉했는데, 알고 보니 오늘 하고 싶지 않다며 문자며 전화가 여러 통이었다. 기침 때문에 컥컥 막히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누굴 탓하리.)


결국 오늘 오후 느지막이 길을 나섰다. 몸이 좀 낫고 보니, 한 시간 거리야 뭐. 아직 젊은(?) 피가 흐르는지 이것도 권리 행사라고 들뜨는 마음까지 들고 말이다.

기표봉을 드는 순간까지 결정을 미뤘었던, 투표함에 용지를 넣고 나오면서도 찌뿌드드했던 나의 지난 "첫" 선택과는 달리, 이번 선택은 비교적 쉬웠다. 비례대표야 일찍이 결정내렸고, 지역구 후보 선택도 투표소 가는 길까지 고민하긴 했으나 마친 후엔 홀가분했으니(선택에 용기를 더해 준 소마 덕이 크다).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반말'로 번호 아냐고 물어보는 투표소 관리 직원이 거슬렸지만, 늦은 시각이니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 조금도 까칠하게 굴지 않았다. 난 가끔 의외의 장소에서 역지사지한다. 국공립시설 할인 혜택을 준다는 이른바 투표확인증을 당혹감(투표했으면 이건 좀 알려주지 그랬나, 소마.)과 함께 들고 나서니 이미 해가 뉘엿하다. 그렇게 투표율 46% 안에 집계됐다.

한나라당이 다 되겠지, 다 되겠지라며 혹시 하는 기대를 무지르고 무질러 왔으므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 놀랍지는 않았다. 아, 노원구병 결과에 철렁하긴 했다. 노회찬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으니.

투표하러 왔냐는 아버지가 대뜸,
"너가 찍은 사람 하나도 안 됐지?"
-"...... 아직 모르죠."

그 말 할 때까지만 해도 진보신당에 한두 석 기대하고 있었다. 노회찬이 아직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적어도 비례대표에서는 지난 대선 문국현이나 정동영을 선택했던 이들이 어느 정도 진보신당으로 돌아서 주지 않겠냐는 계산을 했으니. (기대도 안 했던 엄마랑 아버지가 비례대표 13번 찍으셨다니까, 내가 좀 흥분했나보다)


운동권이 '스포츠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니, 가족들이 기가 막혀 한다. 정정한다. 아버지만 기막혀 했다. K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던 것 같고(내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의 경향과 반응하지 않았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엄마는 조금 소리내서 웃었을 뿐이다. 누가 뭐래도(뭐라 하는 사람도 없지만) 자신은 진보인 아버지는 진보적이지 않은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돈 많은 집에서 곱게 자라 과외 들입다 해서 대학 간 애들이라 그렇겠거니 생각해 버린다. 그렇기만 하면 무지 좋게요? 하여튼 되게 단순하셔.

물론 나도, 겨우 노무현 하나 뽑아놓고 냉소 흘리는 이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노무현도 안 뽑아놓고, 그러니까 계속 한나라당 믿어왔던 이들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냉소할 만큼 열심히 고민은 했던 건지, 그런 고민들이 그리 쉽게 포기가 되는 건지, 아니면 나름의 고민들이 투표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소통이 필요하고 소통을 원하는데,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오리무중에 두려운지라 텍스트로 돌아갈 생각만 나는군.



. 반말로 번호 아냐고 물어봤던 투표소 관리 직원, 지난번과 똑같은 사람이었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대선과 총선 두 번 모두 반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게 내가 어려서인지, 어려 보여서인지, 그에 더해 만만해 보여서인지 모르겠다. 인지상정+어리버버로 인해 "왜 반말하십니까? 대신 얌전히 "모르는데요" 를 선택해버린 것이 마음에 남은 상태. 여유롭게 웃으며 "몰라"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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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마| 약간의 뒤끝.

    FROM peacecat 2008/05/01 01:28  삭제

    테츠는 나의 조언을 받아 뒤끝이 없었지만, 난 아직도 끝이 개운하지 않은 상태다.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와서 진보신당을 꾸린 것이 반갑기도 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진보신당 인물들에게 주목하는 것을 보면 사회당 당원의 입장에서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아직도 무엇이 올바른 판단이었는지 헛갈린다. 내가 가장 바랬던 것은 사회당이 총선 전에 진보신당과 합당하거니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진보신당은 진보신당 나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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